가장 뜨거운 날 열정으로 태어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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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뜨거운 날 열정으로 태어난 꽃
  • 이연정 기자
  • 승인 2007.09.01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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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여행] 안산 호수공원 '해바라기 뜰'에 가다.

   
▲ 안산 단원구 호수공원. ⓒ 손지훈
세상을 녹여 버릴 듯 내리쬐던 땡볕도, 무섭게 퍼붓던 장맛비도, 찜통을 연상하게 했던 열대야도 살랑살랑 꼬리치는 마파람에 맥을 못춘다. 유난히 뜨거웠던 2007년 여름이 이렇게 초라하게 저물어 간다.

8월의 마지막인 오늘 문득 여름의 그 초라함에 빠져들고 싶어진다. 가장 뜨거운 날 열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그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다. 초록이 묻어날 듯 아침이슬을 머금고 있는 싱그러운 자연이 그립다. 초가을 문턱에서 잠시 여유를 청해본다.

다행히 공원이 많은 안산에는 혼자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널려 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기분 좋은 오늘. 단원구 고잔 새도시에 있는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혼자라는 외로움을 떨치려 친구 녀석도 불러냈다. 녀석이 금쪽같은 금요일에 불러낸다며 어리광 부리는 것도 오늘따라 상냥해 보였다. 직업상 나에겐 토요일 같은 금요일 오후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 녀석과 새 직장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일본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해바라기 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1년 뒤 비의 계절에 돌아올께"라는 약속을 남기고 떠난 부인을 간절히 기다리는 남편과 아들. 이들이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온 아내이자 엄마와 장맛비가 내리는 6주간 그려내는 감동의 드라마다. 새삼 이 영화에 흠뻑 빠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나 예쁜 영화다. 장맛비가 멎고 화창하게 갠 날씨가 가슴에 사무치게 슬픈 건 이 영화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영화 속 타쿠미(남편)의 회상 장면에 등장한 해바라기 밭. 미오(부인)와 사랑에 빠진 그 역사적인 장소에 언제가 꼭 가보고 싶었다. 다만 꿈처럼 영화 속에 빨려들었을 때 그런 환상에 젓곤 한다.

불행히도 난 꿈과 현실을 너무나도 분명히 구분하는 편이다. 때문에 가끔은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나를 거부할 때도 있다. 타쿠미가 회상 속에 존재하는 해바라기 밭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것처럼.

한여름에 태어난 나와 많이 닮아 있는 해바라기. 그래서 일까. 나는 꽃들 가운데 해바라기를 가장 좋아한다. 활짝 핀 해바라기를 보니 당시 감동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졌다. 

   
▲ ⓒ 손지훈
해바라기 꽃말이 '숭배, 기다림'이라고 했던가. 그 어느 해보다 강렬한 여름 햇살을 먹고 자란 해바라기. 누가 거들떠보지 않아도 오직 태양만을 향해 있는 미련한 꽃. 그래도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집념이 돋보인다. 같은 여름의 햇살을 먹고 자란 나 역시 미련하기 짝이 없다.

피 끓던 이십대 초반의 열정이 식어버린 지금. 이 녀석의 불타는 집념이 부럽다. 아니 오매불망 간절히 바라던 모습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일까. 사진 작업에 몰두한 친구 녀석을 두고 한참을 멍하니 걷기만 했다. 걷고 또 걷고. 말없이 한참을 걷다 생각했다. '노력 아닌 뜨거운 태양을 핑계로 흘린 땀방울은 거짓'이라고 단정했던 내 어림석음을 책망했다.

가장 뜨거운 날 태양을 벗 삼아 태어난 '기다림의 아름다움'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더불어 쉽게 흔들리는 내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해바라기가 '인디언의 태양'이라는 별명처럼 도심 속에서도 한쪽만 향해있는 풍경을 보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잠시 잊고 지낸 내 꿈들과 자만했던 이기심들을 마주하게 됐다.

당혹스럽다. 해바라기와 마주하게된 것이 우연을 가장해 내 속내를 들어 낸 것만 같아 불쾌함마저 든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다. 홀가분하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마지막 여름날을 보내고 있다.

그제서야 '그리움으로의 초대'라는 주제로 펼쳐지고 있는 이번 해바라기 축제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그리움이나 기다림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 일하고 희망을 품으면서도 정작 그 속에 '행복'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모든 사회적 구속에 얽매여 살아 온 삶에서 여유로워져야 한다.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을 잊고 살아온 것이다. 불행히도.     

사람은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도 싫증이 나지 않지만,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십리만 걸어도 싫증이 나는 법이다. '늘 명랑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그대의 인생을 걸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마음 다잡고 내 이십대의 끝자락을 산책해야겠다. 오늘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 삶에 여유를 찾고 싶다.

내 진심이 통한다면 해바라기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 ⓒ 손지훈

"해바라기야 정말 고마워~."  

..... ............................................................. 덧붙이는 글 ...................................................................

이연정 기자는 다른 직장에 근무하는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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