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7년간 침묵 깨고 대중 앞에 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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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7년간 침묵 깨고 대중 앞에 선 이유?
  • 이정하 기자
  • 승인 2007.07.25 0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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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평화활동가 변신..."레바논 전투병 파병 철회" 주장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아 레바논이여!
팔레스타인이여!
홀로 화염 속에 떨고 있는 너

국경과 종교와 인종을 넘어
피에 젖은 그대 곁에
지금 나 여기 서 있다
지금 나 거기 서 있다

-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중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국가보안법 '반국가단체 수괴')을 주도한 혐의로 사형까지 구형된 시인 박노해. 그는 1998년 8년여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뒤 2000년부터 팔레스타인, 레바논 등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을 찾아 홀연히 떠났다. 80년대 노동운동 선봉에 섰던 그가 일 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침묵으로 일관하자 '운동가의 길을 포기한 것 아닌가'라는 소문이 흉흉했다. 그런 그가 7년간의 오랜 침묵을 깨고 반전·평화 운동가로 대중 앞에 나섰다. 전쟁의 처참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돌아 온 그는 "레바논 전투병 파병을 중단하라'며 거침없이 외쳤다.

   
 
  ▲ 지난 23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박노해 시인이 아프간·레바논 파병반대 1인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 데일리경인 이정하
 
 
지난 23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파병반대 1인 시위를 전개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그가 대중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인 것도 이날로 3번째. 이날 그가 상임이사로 있는 나눔문화평화운동단체인 '나눔문화' 회원 10여명도 동참, 파병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예슬 대학생나눔문화 팀장은 "레바논 파병 철회를 일궈 내기 위해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평화에 대한 목소리를 담아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 19일 UN평화유지군의 이름으로 레바논에 350여명의 전투병을 파병하자 철회를 주장하며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 이들은 "한국군 파병지인 수르는 이슬람 무장조직이 활동하고 있는 위험지역"이라며 "따라서 고귀한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레바논 파병은 철회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특히 "레바논 파병은 우리 병사들은 물론이고 세계에 진출한 우리 기업과 한국인들이 폭탄 공격의 구체적인 표적이 될 수 있다"며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침묵시위인 탓에 인터뷰는 시위가 끝난 7시께서야 가능했다. 기자는 박 시인이 노동운동에서 반전·평화 운동으로 전향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또 오랜 침묵을 깬 이유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오랜 수감생활이 시야를 넓혀줬다. 사회적 약자나 소외 층을 위한 운동도 결국 세계화 속에서 이뤄질 수 밖에 없다. 노동운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확장한 것이다. 인류의 고통과 슬픔을 저버리고 만인의 평화를 논할 수 없지 않는가." 

2005년과 2006년 레바논 남·북부를 다녀온 그는 "전쟁의 폐허로 처절하게 울부짖는 레바논인들을 만났다"며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앰뷸런스나 건설 장비 등 의료 재건부대"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레바논은 최근까지도 교전사태가 빈번하고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위험지역"이라며 "이런 곳으로 전투병을 보내는 것은 테러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미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레바논에 전투병을 파병했던 19일 아프가니스탄 텔레반 무장단체가 한국인 23명을 납치한 것도 정부의 파병과 무관치 않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번 납치 사건은 한국군 아프간 파병이 원인"이라"며 "납치된 한국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정부의 조기철군 의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 일고 있는 한미동맹이나 남북 정세 등을 고려해 파병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주장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이번 납치 사태가 그것을 말해주지 않나. 납치 및 테러 위협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관심과 전 국가적 역량을 총 동원하고 있다. 그 만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남북관계도 이미 화해기류가 형성돼 있다. 결코 한미동맹 등 편향된 시각에서 국익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세계평화를 헤치는 일이다."

   
 
  ▲ 박노해 시인이 상임이사로 있는 나눔문화평화운동단체인 '나눔문화' 회원들이 파병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데일리경인 이정하
 
 
레바논 국경지대 곳곳을 누비며 전쟁의 실상을 파헤칠 당시 그는 "한국에도 반전·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레바논인들이 형제의 나라가 된 것 같아 기쁘다는 말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며 "그들이 파병만큼은 막아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했다.   

이 것이 바로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대중 앞에 서게된 이유다. 그들이 자초한 전쟁이 아닌 외부세력에 의한 '레바논 현지 상황의 절박함'이 그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이다.

시인 박노해가 생사의 현장을 누비며 파헤친 레바논 전쟁 실상, 그 중심에는 '통곡하는 레바논인'들이 있었다.  그는 '레바논 침공에 대해 대한민국은 불의와 학살 앞에서 침묵하고 있다"며 "그들 앞에서 대한민국은 죄인"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오 위대한 침묵의 나라 코리아여
너의 침묵에 머지 않은 어느 날엔가
네가 짓밟히고 피에 젖어 울부짖을 때
세계는 너의 침묵을 찬란히 돌려주리니

- 박노해 '침묵의 나라' 중에서

한편 박노해 시인은 세계 최초로 레바논 전쟁을 다룬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라는 다큐멘터리 책을 펴냈다. 레바논 전쟁의 처절한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한 글과 함께 100여장의 사진 등을 수록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적은 소유로 기품있게 살아가는 대안 삶의 비전 제시와 평화나눔'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시집으로 <노동의 새벽> <사람만이 희망이다> <아체는 너무오래 울고 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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