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경인 자유기고가 지천] 양평을 지나 홍천으로 가는 6번 국도를 따라 20여 분을 가다보면 44번 국도와 갈라지는 용두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원주, 횡성방향으로 몇 구비 돌아 50여리를 더 진행하면 도덕고개가 보이고 오르막을 돌면 왼쪽으로 잘 정리된 진입로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 ‘풍수원성당(강원도 유형문화재 69호)’이다.
▲ 우리나라 신부가 최초로 건축한 횡성 '풍수원성당' 전경 |
지금이야 잘 닦여진 국도가 성당 앞을 지나지만 오래전 이곳은 첩첩산중임에 틀림없었다. 조선시대에 불교도들이 탄압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듯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천주교인들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이후 80여 년 동안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해오던 이들은 1888년 불란서 출신의 ‘르메르 이(Le Merre)’ 신부님을 맞이하면서 정식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곳에 부임한 르메르 이 신부는 춘천을 비롯해 화천, 양구, 홍천, 원주 등 12개 군을 모두 관할하였으며 당시 신자는 총 2,000명 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뒤이어 1896년 2대 ‘정규하(Augustine) 아우구스띠노’주임신부가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정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 ‘진 베드로’와 함께 현재의 성당을 착공하고 13년 후인 1909년 낙성식을 가졌다.
정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1896년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사재서품을 받은 한국의 세 번째 신부였다. 성당건축에 혼신의 힘을 쏟은 정 신부는 풍수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47년간 이곳에 머무르다 선종(善終)했다고 전해진다.
풍수원성당은 120평 규모로 정문과 양쪽 벽면에 각각 여닫이 출입문을 내었는데 이곳을 찾는 신자들은 그 옛날 전통을 잇기위해 아직도 옆문만을 사용하고 있다. 바닥은 건축당시의 것으로 장궤(두 무릎을 대고 몸을 세운 채 꿇어앉을수 있는 책상) 없는 마룻바닥으로 아치형 천장과 잘 어울린다. 특히,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아늑한 고딕 건축물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외견상 명동성당(사적 제258호)을 축소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처음 건축당시에는 제대와 성물 등이 목재였으나 나중에 석조로 교체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12년 건축,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유물관에는 당시 사제들이 미사 때 사용하던 촛대와 의식복, 율무묵주, 기도서 등 각종 유물들이 역사자료와 함께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이곳엔 총 320점의 초기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어 순례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성당을 바라보고 왼쪽 동산방향으로 올라가면 판화작가 이철수 씨가 예수 최후의 고난상인 ‘14처’를 예술적 이미지를 가미해 동판화로 제작, 전시한 것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16부작 드라마 러브레터의 촬영지인 풍수원성당 일대는 한국 최초의 신앙촌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여러곳에 있었다. 그러나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들어선 것과는 달리 험한 산골짜기를 찾아 특정 종교인들이 모여 이룬 마을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앙촌인 풍수원은 6.25를 거치면서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전후 북에서 넘어온 난민 중심의 교우촌으로 새롭게 형성되었다. 지금 성당 입구의 마을은 30여년 전 도로정비사업과 새마을운동으로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다.
횡성군과 원주교구청은 풍수원성당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고 복합성지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총 257만㎡(78만평)에 10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22만㎡(6만8천평) 규모의 ‘유현문화관광지(바이블 파크에서 명칭이 바뀜)’ 조성을 목표로 현재 토목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사업초기, 부지조성과정에서 이 지역 농민들과 강제 수용에 따른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풍수원의 역사적 가치 등을 고려해 서로 양보하며 타협을 이끌어 낸 것이 추진력을 키웠다. 횡성군은 2009년 성지가 완공되면 풍수원성당을 중심으로 수목원과 피정의 집, 미술관, 수련관, 가마터 등을 천주교 신자와 일반인들에게 상시 개방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