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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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 김광충 기자
  • 승인 2008.06.30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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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9월 24일 한국 천주교 원주교구원동성당에서 사제들이 민주회복·인권회복·민권회복 등을 목적으로 결성한 사회단체. 
 
1970년대 한국은 유신체제가 지속되면서 정권에 대한 누적된 불신과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게 표출되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1974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이 사태에 대처방안을 찾던 바, 각 교구의 사제들은 효율적인 반정부운동과 그것을 전담할 기구가 필요함을 공감했다.
 
이에 1차로 같은 해 8월 10일 서울대교구에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고 8월 26일 인천교구 사제단이 주체가 되어 첫 전국사제단의 입장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사제단이 출범한 것은 9월 23일 원주교구 원동성당의 세미나에서였다. 이때 약 300여 명의 사제들이 참석하여 전국 규모의 사제단을 결성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 명칭을 정했다. 다음날 사제단은 기도회를 갖고 사제단의 출범을 발표했으며 9월 26일에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기도회를 갖고 제1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국내외에 사제단의 출범을 알렸다.

 이후 사제단은 여러 차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수십 차례의 기도회와 평화적 가두시위를 벌임으로써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비민주적 정치상황 등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1987년 4·13호헌조치에 사제단이 단식으로써 강력한 저항을 표시하고 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다시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제단은 가톨릭 내 보수적 성향을 지닌 세력들에 의해 현실정치에 가톨릭이 깊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저지를 받기도 했다. 1987년 문규현 신부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사제단은 '민족통일과 화해, 민족공동체 실현'을 목표로 국가보안법 철폐운동과 북한동포돕기운동, 북한선교활동 등의 사회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교회의 쇄신에도 힘쓰고 있다. / 출처: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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